부엌에 피어오르던 따뜻한 국물
어릴 적 내 기억 속 할매는 늘 부엌에 계셨다.
지금처럼 반짝이는 주방이 아니었다. 연기 자욱한 아궁이 옆에 쪼그려 앉아, 낡은 솥단지에 뭔가를 푹푹 끓이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국물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무를 두툼하게 썰어 넣고, 뼈와 함께 우려낸 소고기국은 온 집안 구석구석 따뜻한 김으로 채워졌다.
할매 손맛의 비밀
배고파서 괜히 부엌을 맴돌면 할매는 국 한 숟갈 떠서 후후 불어 입에 넣어 주셨다. 뜨겁지만 참 달았다. 요즘 파는 즉석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맛이었다.
할매는 간을 보겠다며 연신 국을 한 숟갈씩 떠먹더니, 결국 가장 맛있는 국은 식탁이 아닌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농담처럼 웃으셨다.
할매 손맛은 그 국 한 그릇으로 시작됐다.
당시엔 몰랐다. 할매가 아무렇게나 넣는 듯한 소금 한 꼬집, 마늘 한 스푼에 그 깊은 맛이 다 담겨 있었다는 걸.
지금 생각해보면 레시피는 없었다. 그저 손끝 감각과 계절의 온도로 맛을 내셨다. 무가 달아지는 겨울이면 국물이 달콤해졌고, 초봄엔 쓴 나물 넣어 쌉싸름한 맛을 더하셨다.
김장터에서 피어난 동네의 정
한겨울 할매 집은 늘 시끌벅적했다.
이웃집 김장하는 날엔 우리 집 마당도 김장터가 됐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배추가 소금물에 담기고, 무채와 생강, 마늘 냄새가 골목까지 흘러나갔다.
아이들은 손 시려 울면서도 배추 줄기 하나 뜯어먹고 도망갔다. 그걸 보신 할매는 입가에 미소를 띠시고, “우리 집 김치는 동네 김치다”라며 흉보는 척 자랑하셨다.
그때 그 맛을 다시 찾을 순 없지만
지금은 쉽게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깍두기도 슈퍼에서 사온다.
하지만 가끔 그 국물 맛이 그리워진다. 내가 흉내 낸다고 국을 끓여봐도 그 맛은 나지 않는다. 소고기도 더 좋은 걸 쓰고, 레시피도 적어두었지만 뭔가 빠져있다.
아마도 할매의 시간, 할매의 마음, 그리고 묵묵한 사랑이 아닐까.
할매는 음식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맛있냐”라고 물어본 적이 없다.
그저 빈 밥그릇을 보고 웃으셨다. 남김없이 비운 밥그릇이 할매에겐 최고의 칭찬이었다는 걸 나이가 들고서야 알았다.
할매가 남긴 따뜻함
나는 할매가 남겨주신 그 손맛을 그대로 전하지는 못한다.
대신 내 아이에게는 ‘음식은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것’이라는 걸 전해주고 싶다.
비록 할매만큼 깊은 국물은 못 끓여도, 내 손끝에도 따뜻한 마음 하나쯤은 담아두려고 한다.
요즘은 바빠서 인스턴트 국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부엌 한편에 묵묵히 앉아 국을 끓이던 할매의 등이 생각난다.
무언가 크게 이루지 않아도 좋으니, 내 가족의 식탁만큼은 늘 할매처럼 든든히 지키고 싶다.
누구에게나 집밥에는 특별한 추억이 있다.
그리고 그 집밥의 시작은 언제나 할매였다.
가끔은 솥단지를 꺼내 무 하나 툭 썰어 넣고 국을 끓여본다.
부엌 가득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나는 잠시 할매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