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할배 추억상자

할배의 연장통, 인생을 닮다

시니어 팩트체크 2025. 6. 2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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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연장통의 무게

어릴 적 마당 한구석에는 늘 묵직한 나무 연장통이 있었다.
빗장 하나 달린 그 상자는 내겐 보물상자 같았다. 할아버지는 그 상자를 꺼낼 때마다 진지해지셨다.


어린 나는 못질 한번 하려다 손가락을 다쳐도 할배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대신 말없이 못을 뽑아주고 다시 처음부터 보여주셨다.
그 연장통은 내 어릴 적 교과서보다 훨씬 많은 걸 가르쳐준 선생님이었다.

할배의 연장통

연장에 새겨진 굳은살의 기록

연장통을 열면 못, 망치, 낫, 드라이버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그중 가장 닳은 망치 하나는 할배가 가장 오래 쓴 연장이었다.


어디서 샀는지, 누구한테 얻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그 손잡이에 할배의 굳은살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할배는 마루가 삐걱거리면 그 망치로 못을 다시 박고, 헛간 문짝이 뒤틀리면 못을 뽑아 새로 달았다.
이 집은 대들보만 할배의 것이 아니라, 그 못 하나까지도 할배의 손끝이 스며 있었다.


할배의 일터는 집이었다

할배는 매일같이 새벽닭 울음소리를 깨우고 나서야 밭으로 나갔다.
농사일이 끝나면 대문짝 수리부터 담장 돌 쌓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할배를 찾았다. 누구네 집 처마가 새면 할배가 올라갔다.
전기선이 끊기면 할배가 고쳤다.
할배에게 연장통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과 연결되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어느 날 할배의 연장통을 열다

할배가 세상을 떠난 뒤 연장통은 다락방에 묻혔다.
청소하다가 우연히 그 연장통을 다시 열었다.


낡은 망치 손잡이에 굳은살은 사라졌지만, 손에 쥐자마자 할배의 거친 손바닥이 떠올랐다.
손끝이 얼얼하도록 무거웠던 연장들이 이제는 가벼워졌다.
그 무게는 고스란히 할배의 시간으로 내 마음에 남았다.


연장통이 남긴 가르침

나는 그 연장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못하나 망치 하나가 남긴 땀방울과 책임감은 내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할배처럼 무거운 연장 하나 들지 못해도, 그 마음만큼은 내 일상에 꼭 쥐고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