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
어릴 적 할매네 마당은 비가 오면 더욱 활기를 띠었다.
장독대 뚜껑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경쾌한 북소리 같았다.
나는 비를 맞으며 뛰놀다 흠뻑 젖어도 할매는 꾸중 대신 마른 수건을 내주셨다.
그리고 마루에 앉아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할매의 따끈한 수다방이 열렸다.
동네 할매들의 모임
비만 오면 어김없이 동네 할매들이 우산을 쓰고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파전을 부쳐 왔고, 누군가는 묵은 김치를 내왔다.
마루 끝에는 할매들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식 흉도 보고, 며느리 자랑도 하고, 요즘 나락값이 얼마인지도 그 자리에서 다 해결되었다.
어린 나는 그 틈에 앉아 파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훔쳐듣는 게 재미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수다는 단순한 말잔치가 아니었다.
그 속엔 웃음과 위로, 서로의 하루를 견디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할매의 파전 부침솥
수다방의 꽃은 역시 파전이었다.
할매는 무쇠 부침솥을 달궈 빗소리에 맞춰 파전을 부쳤다.
비 오는 날엔 꼭 파전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장독대 뚜껑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와, 부침솥에 기름 튀는 소리가 하나가 되면
그게 바로 할매의 음악이었다.
비 오는 날이 좋아진 이유
어린 시절에는 비만 오면 신발 젖고 옷 젖어 짜증이 났지만
할매네 집에만 가면 비 오는 날이 기다려졌다.
파전 냄새, 빗소리, 그리고 할매의 수다가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장 고급스러운 힐링이었다.
지금 내 수다방
이제는 동네 풍경도 바뀌어 그런 수다방은 사라졌다.
누구 하나 파전을 부쳐 나눠먹을 이웃도 드물다.
하지만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나도 파전을 굽는다.
솥에 지글지글 기름 냄새를 피우고 나면
내 마음 한켠에 살던 할매의 수다방 문이 살짝 열린다.
나는 그 문을 통해 다시 할매를 만난다.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할매의 웃음소리가 오늘도 내 마음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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